국가지도집 1권  2019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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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삶의 터전인 영토는 전근대 시기에 제작된 고지도에서도 표현된다. 근대 이후의 지도처럼 국경선으로 구획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토가 지니는 개성적인 면모가 다양한 유형의 지도에 표현되어 있다. 이는 한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살아오면서 형성된 영토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우리나라를 그린 전도뿐만 아니라 세계 지도, 고을 지도, 군사 지도 등 다양한 지도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남아 있는 지도는 조선 시대 이후의 것들이다. 현존하는 고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도로는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 代國都之圖)」를 들 수 있다. 이 지도는 당시 제작된 세계 지도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지도를 보면 조선의 영토가 서쪽의 아프리카 대륙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중국에 버금가는 문화 국가로서의 자부심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영토가 가장 명확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 전도에서 볼 수 있다. 15세기에는 세계 지도의 제작과 함께 국토의 측량을 기초로 한 조선 전도의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세종 때에는 각 군현 간의 거리 측정이 이루어지고 백두산·마니산·한라산의 위도 측정 등을 통해 보다 과학적인 지도 제작의 기틀이 확보되었다. 정척(鄭陟)은 1451년에 함경도와 평안도에 해당하는 양계(兩界) 지방의 지도를 완성하였고, 1463년(세조 9)에는 양성지(梁誠之)와 같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였다. 현존하는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는 15세기에 제작된 조선 전도를 계승하고 있다. 지도에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만주 지방까지 그려져 있다. 양성지와 같은 학자는 우리의 영토가 만주까지 이어지는 ‘만리강산(萬里江山)’ 으로 보았는데, 지도에는 이러한 영토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전도로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를 들 수 있다. 이 지도는 지지를 보완하는 부도(附圖)의 형식을 띠고 있는 데, 수록된 내용이 소략하다. 지도 제작의 목적은 국가의 영토를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왕권의 위엄과 유교적 지배 이념을 확립하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도에는 사전(祀典)에 기재되어 있는 악(嶽)독(瀆)해(海)와 명산대천(名山大川) 등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해나 황해에는 울릉도·우산도(지금의 독도), 흑산도와 같은 섬들이 강조되어 그려져 우리의 영토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왜란과 호란의 양대 전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유형의 지도가 제작되면서 우리의 영토를 개성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한반도의 북부 지역, 해안의 도서 지역 등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지도에도 반영되었다. 「요계관방지도(遼葪關防地圖)」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 등과 같은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접경 지역을 상세하게 그린 군사 지도와 해안의 방어에 필요한 「연안해로도(沿岸海路圖)」 등이 제작되면서 변경 지역이 조선의 영토로 확고하게 인식되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정상기(鄭尙驥)의 「동국대전도」가 제작되었다. 정상기의 「동국대전도」는 약 42만분의 1의 대축척 지도로 백리척(百里尺)이라는 독창적인 축척이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의 지도와 비교하면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가 현재의 지도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세밀해졌고,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정확해졌다. 「동국대전도」에 이르러 조선의 영토가 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동국대전도」는 이후 관청이나 민간에서 널리 필사되어 활용되면서 「해좌전도」와 같은 목판본 조선 전도의 기본 지도가 되었다.

 

 조선 시대의 영토는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이르러 완결된 형태로 묘사되었다. 김정호는 1834년에 당시까지 축적된 전도 제작의 성과를 기초로 「청구도(靑邱圖)」라는 지도책을 만들었다. 청구도는 상·하 2 권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은 홀수 층으로 하고 하권은 짝수 층으로 되어 있어서 상하를 잇대면 두 층을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어 1861년에는 불후의 명작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지만 그 형식과 내용을 혁신한 것이다. 「청구도」가 책의 형태로 제작된 것에 비해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을 접어서 만든 22개의 지도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첩은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몇 첩을 연결시켜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또한 표현 기법에 있어서도 산천을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산천 분합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고, 인문 요소의 표현에서는 각종의 기호가 사용되었다. 특히 도로망에는 10리마다 표시를 하여 지역 간의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내륙의 산천에서 도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영토가 지닌 개성적 면모를 세밀하게 표현한 지도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지도 제작의 흐름은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근대적 측량 기술을 접하고 삼각 측량에 의한 지도 제작을 시도했다.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삼각 측량이 행해졌고 일부 지방에서도 측량에 의한 지적도의 제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근대적 지도 제작술은 이 시기 제작된 전도에도 반영되었다. 교육용 교과서로 집필된 「대한지지」나 「대한신지지」에는 경위선 좌표 체계에 기반한 전도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장지연의 「대한전도」에는 당시 우리 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북간도가 우리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우리의 영토를 그리려던 노력은 1910년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면서 단절되었다.